영천시장 이야기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입력 2024-02-29 14:45   수정 2024-02-29 16:48


몇 년 전에 엄정화 주연의 '오케이 마담'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병뚜껑 이벤트로 하와이 여행에 당첨된 엄정화가 좌충우돌 하는 코미디 영화다. 엄정화의 극중 배역이 '영천시장 꽈배기 아줌마'였다. 영천시장의 꽈배기는 이처럼 유명하다. 수십년 전 비디오 방을 달군 에로영화의 주인공들, ‘젖소 부인’, ‘김밥 부인’, ‘만두 부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착한 아줌마, '꽈배기 아줌마'다. 방금 튀긴 꽈배기를 설탕에 굴려 먹으면 정말 맛있다. 가격도 싸서 1천원에 무려 3개나 준다. 얼마 전까지는 5개였다. 1만 원을 내면 50개, 2만 원이면 큰 박스에 백 개나 담아준다. 박스로 사가는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경찰, 군인들이란다. 한 박스, 두 박스 사가면 아마도 중대원들이 다 먹을 정도로 근사한 회식도 가능할 것이다. 나도 한 박스 사보려다가 그 많은 꽈배기를 줄 사람들이 없어 망설이고 있다. 이렇게 싸게 팔아도 남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



영천시장에는 꽈배기만 싼 것이 아니다. 칼국수도 싸다. 몇 년 전에는 한 그릇에 2500원이었는데 얼마 전에 들렸더니 4천원을 받는다. 막걸리 한 병과 같이 먹어도 1만원을 내면 2, 3천원을 거슬러 준다. 나의 소박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안산이나 인왕산에 오른 후 이곳에서 칼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여 먹는 것이다. 그리고 인근의 이진아 도서관에 가서 꾸벅꾸벅 졸며 책을 읽는 것이다. 함께 하실 분을 찾는다.

'맛의 해방구', '가격의 해방구' 영천시장에서 꽈배기와 더불어 유명한 곳은 떡집이다. 한때는 서울 시내 떡의 70%를 공급했다고 한다.

영천시장의 유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2011년이 돼서야 전통시장으로 등록됐다. 영천시장을 얘기하기 앞서 이곳에 있던 건물부터 알아야겠다. 서대문 밖의 랜드마크는 지금 서울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경기감영’과 독립문 옆에 있던 ‘독립관(모화관)’이다. 경기도는 지방 행정단위이면서 서울을 지키는 방패 구실을 했다. 그래서 경기도에는 서울을 지키는 경기 중군이 있었다. 서지(西池) 옆에는 아름다운 정자 천연정이 있었고, 그 자리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다. 지금의 금화초등학교 자리다. 서지, 반송, 정자가 있는 이곳은 한양 십 경에 포함될 정도로 경치가 뛰어났다. 경기중군 자리가 일본 공사관으로 변했다. 그래서 임오군란의 현장이기도 하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이 독립관으로, 은혜로운 중국 사신을 맞는다는 영은문은 주초만 남기고 그 자리에 독립문이 세워졌다. 너무도 아름다운 이곳, 만초천(무악천)을 끼고 이어지는 중국으로 가는 의주로 천리 길. '국중 1로'로 늘 정비가 돼있던 길이다.

이런 역사성 외에도 이곳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하여 장안 사람들에게 야채를 공급하는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영천시장 앞에 있던 돌다리 석교의 남쪽지역을 교남동, 북쪽을 교북동이라 하는데 이 지역이 물류의 집산지였다. 통상 영천이라 불렀다. 와암천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맛이 시원하고 영험하여 영천, 냉천이라 했다. 우리말로는 ‘찬우물골’이다.

1935년 8월 10일 자 조선중앙일보에는 이 일대를 "대경성의 서북 현관으로서 나날이 약진하는 감영 앞"으로 설명했다. 조선시대에는 종로시전 외에는 공인된 시장이 없었다. 서소문 밖에 칠패시장이 있었다고 하나 그곳에서는 마포로 집산되는 어패류를 많이 팔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먹어야 했다. 생선과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것이요,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밥에 김치를 비롯한 채소를 먹어야 했다. 오죽하면 떡이나 빵을 배부르게 먹고도 밥 배가 따로 있어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성문 안에 필요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성저십리의 대표적인 장소로서 이곳 영천은 서부권 채소 물류의 중심이었다. 심지어는 영천에서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은 식구가 많으면 방을 공짜로 준다는 말까지 있었다. 식구가 많으면 그만큼 똥을 많이 싸니 그런 말이 나왔다. 비료도 없고 특별한 농사 기술도 없던 시절에 인분은 채소밭의 최고 비료였다.

나도 어릴 적에 똥밭에 발이 빠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밭에 똥을 부어 놓고 발효 시키기 위해 흙을 덮어 놓는데 그것도 모르고 밭에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영천 일대는 이렇게 일차원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았다.

무악재 넘어 홍제나 구파발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경작물을 팔았다.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동대문 밖은 주로 미나리 밭이 많았고, 이곳은 무와 배추 등이 많이 유통됐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채소를 사기위해 이곳으로 왔다.

무악재에서 구파발로 이어지는 내륙에 밭이 많았다. 무악과 안산, 크고 작은 산과 언덕 사이 사이 땅에는 밭농사가 제격이었다. 배추와 무를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무악재를 넘어 영천으로 들어왔다. 특히 교북동은 김장철 채소를 팔려는 상인들로 넘쳐났다. 새벽 1시에 문을 열어 5시에 문을 닫는 부지런한 상인들이었다. 이곳에서 유통된 것은 채소만이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말이 유교사회였지 사실 중요한 결정은 풍수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입으로는 유교를 외치지만 인생사의 중요한 고비에는 풍수가 한 몫을 했다. 산세를 해친다고 하여 사대문 안에는 묫자리를 쓰지 못하게 했다. 작은 땔감도 채취를 금했다. 목멱산(남산), 인왕산, 타락산, 백악산 등 눈만 돌리면 산이 펼쳐진 곳인데도 나무를 할 수 없었다. 성안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땔나무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무와 배추를 마차에 싣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사람들, 지게에 땔나무를 자기 키보다 두 배는 높게 쌓은 사람들, 이곳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세란병원 자리에는 전차 종점이 있었다. 성문 안 사람들 뿐 아니라 애오개나 마포 사람들도 이곳으로 장을 보러 왔다. 고양의 화전, 능곡, 일산 사람들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영천 앞, 교남동 큰길가, 만초천 변에 있던 시장들이 한곳에 모인 것은 6.25전쟁 이후로 추정된다. 공설시장으로서의 모습을 갖춘 것이 전쟁 이전인 1939년, ‘관동공설시장’이다. 모화관이 있던 동네라 해서 관동(館洞)이라 불렸고, 시장 이름도 관동이 됐다.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들도 이곳에서 생필품을 유통했다. 교남동의 아낙들은 만초천 물가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세탁물을 삶았다. 옷을 염색해서 파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들은 자칫하면 빼앗길 염려가 있어서 무조건 이곳에서 검정색으로 염색했다. 이곳의 풍경은 아마 동대문 인근의 청계천과 비슷했으리라 짐작된다. 1967년부터 만초천이 복개돼 염색할 곳은 없어졌다. 그러나 복개된 곳에 버젓한 시장이 자리잡았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영천시장이 전통시장으로 공인된 것은 2011년 7월이고 이후 서부지역의 대표적 전통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한번 방문해 보시기를 권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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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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